편집자주: 강남역과 역삼역 일대의 테헤란로 주변 마을 이야기다 1600년부터 2018년의 400년간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의 스토리와 삶터의 흔적을 통해 시대와 사람의 삶의 모습을 따라가본다. 그 과정에서 땅을 무대로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생활상과 삶의 본질이 파악된다. 어제를 통해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Editor Note: Let’s look at the Story of the people who lived at Yeoksam-dong through Yeoksam-dong through the Gangnam and Yeoksam Station around the town of Teheranro during 1960s. In the process, the nature of life that manages to live on earth is understood. Through the memories yesterday, we must get wisdom to live today.
글 이재홍 Mr. Lee Jae-Hong (CEO of Millbridge Cafe)

필자가 살았던 밀브리지 카페 부근의 역삼동 거리. 이 부근이 예전에는 모두 논과 밭이었다

외할머니 손 잡고 역삼동 여우골을 지난 봉은사 나들이하고
외증조 할머니는 스님이 되신 후 결혼도 하셨다. 그리고 절에서 절살림 살고 수행을 하시면서 사셨다. 일제 시대에 일본의 대처승 제도에 의해 결혼하는 풍습이 이 땅에도 도입되었던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봉은사는 스님들의 공부방 격인 강원이었다. 필자는 외할머니 손을 잡고 증조 외할머니가 계시는 봉은사로 자주 나들이를 했다. 역삼리에서 봉은사로 가기 위해서는 산길을 걸어 역삼동 산 정상의 여우골을 지나야 했다. 당시 현재의 역삼역 지점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고 깊은 계곡도 있었다. 필자는 할머니 손을 잡고 역삼동 근처 산을 지날 때 우거진 수풀과 계곡을 지나야 했다. 학동은 숲이 우거진 지역으로 일제시대 때 능이 있어 숲으로 왕가의 권위를 보전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골이 깊은 여우골을 지날 때 필자는 무서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마지막까지 하셨던 증조 외할머니의 임종을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평소 수행을 많이 하셨던 증조 외할머니는 당신의 임종 시간을 미리 아셨다. 그래서 목욕 재계하고 가족들을 모이게 하고 유언을 하셨다. 증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절의 장례풍습에 따라 다비식을 했다. 외삼촌은 다비식이 끝나고 증조 외할머님의 다비를 모아 사리탑을 건립했다.

Visiting Boengeun-sa with grandmother
After the great grandmother became a monk, she also married. And she lived in the temple, living and working. It is thought that the custom of the Married Monk System Japan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period was also introduced to this land. At that time, Bongeun-sa was a gangwon, a monk ‘s study room. I grabbed my grandmother’s hand and went out often to visit a great grandmother. To go from Yeoksam-ri to Bongeun-sa, we had to go through the mountain road and pass the fox’s hole at the top of Yeoksam-dong. At that time, Yeoksam Station was the highest mountain in the area and also had a deep valley. I grabbed my grandmother’s hand and passed through thick forests and valleys as I passed through the mountains near Yeoksam-dong. Hakdong is a forested area, and it was able to maintain the authority of the royal family in the fores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 used to be scared when my grandmother and I went through a deep fox hole.

I watched the dying of the great grandmother, who had been worked as a master of Bongeun-sa temple, with my family. A great grandmother who had been doing a lot of usual work knew beforehand the time of her death. So she resumed the bath and gathered my family and made a will. When my great – grandmother died, I went to the funeral ceremony according to the customs of the temple. My uncle ended the daibi ceremony and built the sari tower by collecting daebi of the great-grandmother.

역삼동 밀브리지 카페 뒤에 남아있는 유일한 한옥 집

봉은사 가는 여우골은 일대에서 가장 산이 높아 깊은 계곡지대였다. 현재 역삼역 부근이 가장 지대가 높아 역삼역에서 보면 강남역이 내려다보인다`

도라지, 수박, 토마토 농사로 돈 벌어 땅에 투자한 외할머니
역삼동의 부잣집인 심씨가에 시집을 온 외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한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광주 군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평생 글을 읽는 선비 생활을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시대 선비들처럼 집안 살림에는 무관심하고 시를 짓고 한학을 하면서 배움에 정진하셨다. 그런 탓에 집안 살림은 온통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당시 역삼동에는 도라지 농사가 잘 되어서 집집마다 도라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외할머니도 역삼동 밭에 도라지는 물론 토마토와 수박을 재배하셨다. 수확을 하면 나룻배로 강을 건너 물건을 싣고 가서 도성 시장에 내다 파셨다. 외할머니의 농업은 날로 번창했다. 이재 마인드가 있었던 외할머니는 일대의 땅을 계속 매입해서 집의 부를 축척하셨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말년에 아쉽게도 자궁암에 걸려 67세에 돌아가셨다. 말년에 암에 걸려서 오래 사시지 못하는 것은 아신 외할머니께서는 자신이 모든 돈으로 여한 없을 정도의 해외 여행을 다니시기도 했다.

My grandmother who invested in land, earning money from bellflower, watermelon and tomato farming
The grandmother who got married to Shim, a wealthy family in Yeoksam-dong, was a stronger living person. My grandfather was born as the second son of the governor of Gwangju province and lived a lifetime of reading. My grandfather devoted himself to learning by doing indifferent, poetry, and studying in a house, like his father. Because of that, the housemaid was a part of my grandmother.

At that time, the bellflower farming in Yeoksam-dong was well done, and the bellflower farming was popular in each house. My grandmother also raised tomatoes and watermelons as well as bellflowers in Yeoksam-dong. When they harvested, they crossed the river by ferry, loaded the goods, and sold them to the city market. My grandmother’s agriculture flourished day by day. My grandmother, who had a living mind, continued to buy the land and accumulated the wealth of the family. However, my grandmother died at the age of 67 when she was suffering from uterine cancer. In the last years, my grandmother, who has come to know that she could not live for a long time, traveled abroad with some of her money.

1960년대 역삼동 60여 가구 도라지 농사와 논농사 짓고 살아
필자의 기억으로 1960년대 역삼동의 가구수는 불과 60여 가구 정도였다. 그 시절 역삼동은 도라지 산지로 유명하셨고 밭농사와 논농사도 겸했다. 농사 짓는데 필요한 물이 흐르는 냇가가 역삼동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반포까지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잠실 운전면허 시험장을 거쳐 한강 본류로 이어졌다. 반포에서 잠실까지 이어지는 냇가에 겨울 철 얼음이 얼라치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냇가를 따라 얼음지치기를 했다.

In the 1960s, Yeoksam-dong, 60 households,
In my memory, Yeoksam-dong has only about 60 households in the 1960s. At that time, Yeoksam-dong was famous for its bellflower farms, and farmed fields and paddy fields. The water stream flowing through the center of Yeoksam-dong was flowing through the farm. It continued to Banpo to the west and Jamsil driving license test hall to the east, leading to the Han River main stream. When the winter ice was frozen in the stream running from Banpo to Jamsil, the children tired of ice skating along the stream.

현재 삼성역 일대가 예전의 봉은사에 속했다고 한다. 현재 봉은사는 경기고등학교 뒷 편에서 아셈타워 맞은편 자락에 위치한다

몇 십 년 모은 백송으로 70년대 외가댁 한옥으로 증축해
필자가 살던 외할머니댁은 한옥집이었다. 역삼동의 부잣집이었던 외할머니맥은 3일에 쌀 한가마니로 밥을 지을 정도로 식솔이 많았다. 외할머니께서는 댁 주변으로 33가구의 한옥이 지어 세를 놓고 계셨다. 필자는 외가댁에서 한옥을 증축하는 것을 보았다. 요즘이야 돈만 주면 자재 구하기기 어렵지 않지만, 자재가 귀하던 그 시절 집을 지으려면 먼저 자재를 모아야 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선비들이 기거할만한 집을 짓기 위해 백송을 몇 십 년 동안 모아서 70년대에 기와집을 새로 지으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살아 생전 큰 아들과 세 딸을 두셨다. 큰 아들이신 외삼촌께서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50대에 돌아가셨다. 외삼촌은 젊은 시절 무역업을 하셨다. 역삼동 부잣집 심씨가의 맏아들이셨던 외삼촌은 박애주의자셨다. 필자가 13살 때 외삼촌은 100일된 아이를 입양하셨고, 이후 7남매를 입양해 키우셨다. 외삼촌은 돌아가시기 전에는 서초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셨다. 고아원을 운영하시면서 고아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주기 위해 영화관에 데려가서 함께 영화도 보셨다.

It was built in the 1970s with the Baek Song, collected for several decades
My grandmother’s house I lived in was a hanok. My grandmother house, who was a wealthy in Yeoksam-dong, had many people to eat, so that she cooked rice with a sacks in three days. My grandmother built a house with 33 family around her house. I have seen the addition of a hanok in my family. Nowadays, it is not hard to get material if you give money, but those days they had to collect the material before they built the house that the material used to be. My grandfather assembled bunch of plant in the ’70s, collecting white pine trees for decades in order to build a house where he could live.

My grandmother had a eldest son and three daughters. My uncle, the eldest son, died in his fifties because his health was not permissible. My uncle was a businessman. My uncle, who was the eldest son of Shim family in Yeoksam – dong, was a philanthropist. When I was 13, my uncle adopted a 100-day child, and after that, he adopted seven brothers and sisters. Before he died, he operated an orphanage in Seocho-dong. While operating an orphanage, he took his son to the cinema to give him cultural benefits and watched the movie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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