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신문화의 고장 안동의 가일마을을 찾아간다. 1400년대 사람의 마을이 형성된 이후 600년 세월 마을에서 일상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과 가치를 따라가본다. 자연의 마을에서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Editor Lee Jiyeon

안동시 풍천면 소재 넓은 풍산 평야를 내려다보는 검무산 자락에 안동의 대표적인 집성촌 가일마을이 있다. 1400년 고려조 성립의 기틀을 이룬 안동 권태사 후손들 중 북양공파 권항이 마을에 입향한 이래 지난 600년 동안 안동 권씨의 후예들이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이자, 자연의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한 해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일마을의 저수지 역할을 하는 연못이 있다. 그리고 선비가 세운 마을답게 선비의 상징인 회나무가 오랜 연륜을 자랑하며 늠름하게 서있다. 마을 뒤편 검무산과 좌우 산이 마을을 감싸 안는 형태로 한옥이 수 십 채 들어서 사람의 마을을 이룬다. 현재 가일마을 안에는 역사성을 지닌 14채의 고택이 있고 이중 여섯 채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5세기 초 권향 입향, 자연이 일군 사람의 마을을 이루고
안동 권씨가 가일마을을 이룬 계기는 세종대왕 때 정랑을 지낸 권향(1403-1461)에 의해서다. 권향이 하회마을의 대가댁 류씨 가문과 인연을 맺고 이 곳에 살림터를 마련했다. 권향은 하회마을 류서의 사위가 되면서 가일마을에서 일가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후 권향의 손자 권주 대에 과거에 급제하며 가풍을 이어 가일 마을에 안동 권씨 가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일마을을 이룬 권씨 가문도 조선조의 숱한 정치권력의 세력다툼 속에서 온전하게 한 세상을 살아내지 못했다. 학풍과 의義와 충忠의 도리를 지키며 선비의 기개를 펼치던 숱한 영혼들이 목숨을 잃었다. 권향의 손자 권주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후 권주의 큰 아들 권질은 귀양을 갔고, 차남 권전 또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다. 사화로 인해 권주의 넷째 아들 권굉과 권굉의 차남 권의남, 손자 권경행으로 가일마을의 권씨 가문은 맥을 이어갔다.

가일마을 앞에 자리한 낙동강가의 풍산평야가 마을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가문을 이어가는 삶의 터전이다

가일마을 입구의 저수지는 한 해 농사를 지켜주는 생명수다

권구의 학풍과 맥을 이은 병곡종택, 시대정신을 지키며 명문가로 자리매김
현재 가일마을에는 권경행의 증소자인 병곡炳谷 권구의 학풍과 맥이 이어지고 있다. 권구는 유학자 이현일의 제자이며 안동에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며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권구는 성학과 후학 양성에 뜻을 세워 정진하는 가운데, 안동 권씨 가문을 학문적으로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18세기 초 ‘이인좌의 난’으로 그도 또한 화를 면치 못하였다. 그럼에도 권구는 뜻을 굽히지 않고 후학 양성에 몰두하며 선비의 도를 이루었다. 권구는 사후 사헌부지형에 증직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기도 했다.
가일마을의 안동 권씨 가문은 조선 시대에 학문을 이루고 후학 양성을 통해 선비의 시대적 도리를 다했다. 가일마을의 안동 권씨는 조선조 500년 동안 여러 사화와 국난에 의해 고난을 겪었지만, 의義와 충忠으로 가문을 지켰다. 안동 권씨는 시대정신을 지키는 가운데,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가문 풍산 류씨, 순천 김씨, 안동 김씨, 신정 이씨, 재령 이씨 등 지역의 명문가와 혼맥을 형성하며 명문가의 자리를 지켰다.

권오설 생가터

의를 구하는 선비의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던 의인의 고장 가일마을처럼 안동은 한국에서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의 무덤은 2008년 이장되고 고향에 돌아왔다

일제 치하 가장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가일마을 젊은이의 정신
근대에 들어서 가일마을은 다시 한 번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위치에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제국주의 횡포가 심화되자, 권오설 선생은 분연히 일어섰다. 당시 제국주의 체제가 이 땅의 소작농민에게 7할의 소작료를 요구하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이에 격분한 권오설은 소작농은 물론 중소지주가 참여한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해 전국의 농민조직으로 확장했다. 또한 권오설은 3.1운동을 계승해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권오설은 농민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던 조선공산당에 가입,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을 역임하며 새로운 시대가 요구는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으로 인해 권오설은 일제에 검거되었고, 34세가 되던 1930년 4월 복역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감옥에서 안동으로 시신이 운구될 때, 인근의 안동 사람들이 그의 운구를 따라 인간띠를 이루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에 항거하며 사람들을 결집하여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고 했던 의인에 대한 존중과 추모의 행렬이었으리라.
가일마을의 한 젊은이가 주도한 독립운동은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세력을 키워냈다.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은 권준희, 권오상, 권오운, 권오창 등의 안동의 독립투사들로 이어졌다. 의를 추구하던 선비정신에서 발로한 가일의 젊은 선비들의 독립정신과 투쟁활동으로 인해 경북은 결국 일제 시대에 가장 많은 독립운동 투사를 배출한 고장이 되었다. 특히 경북 19개 시군 중 안동이 배출한 독립투사가 가장 많다.
의와 충을 추구하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근대에 대한민국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안동의 젊은이들이 의와 충의 세계를 지켜내도록 하는 동기가 된 것이다. 의와 충은 과거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삶의 본질을 자각하고 인간의 도리와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지켜내고 추구해야 할 삶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의와 올바름의 가치가 실현되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본다.

나라를 지키고 가문을 일구며 사회를 지도했던 권구 선생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조성된 성곡종택

가일마을 사람들도 21세기 혁신의 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삶에서 배우고 터득해야 할 가치를 생각하며 일상의 삶터를 소중히 여긴다

8월 어느 날 한적한 가일마을의 전경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의義와 충忠을 추구하는 21세기 시대정신의 주소
21세기 초반 융복합의 시대에 가일마을을 찾아 성곡종택에 섰다. 이 시대에 다시금 인문학이 세간의 관심을 이끌고 인간의 도리를 찾아 지키는 길을 나서려고 한다. 그 길에 안동 가일마을을 일구고 지킨 사람들의 삶과 스토리를 만난다. 500년전 이 땅에서 일상의 삶을 일구고 나라를 다스렸던 선현들이 추구했던 시대정신과 오늘의 시대 정신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 가일마을 중심에 선 병곡종택에서 그 답을 구한다.
병곡 선생이 추구하고 지키던 시대정신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의와 충의 가치를 추구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500년 전 시대정신은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가.
이 시대에 義와 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가. 숱한 사람들이 이利를 추구하나 진정 의義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기가 힘들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 사람이 살만한 따뜻하고 안전한 사람의 마을이 형성될 것이다. 이 땅을 지키고 이끌었던 현자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따뜻하고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며 학문을 닦고 노동을 통해 항상 몸과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또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그 길의 의미를 반추하며 우리 시대의 의義와 충忠의 길을 다시 세워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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