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춘

해동경사연구소 이사장
Mr. Kwon Oh-chun,

Chairman of Institute of Eastasian classics

필자는 유년시절 안동의 남서부 지역 남후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2-3km 거리에 소재하는 고산서원에 자주 봄소풍을 갔다. 초등학교 가기 전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의 맛을 조금 알았던 필자는 미천이 흐르는 강가에서 바위산을 마주하고 있는 고산서원의 정취가 마음에 와 닿았다. 키 작은 어린 소년에게 고산서원은 큰 집이었고, 큰 어른이 학문을 이룬 고전의 전당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나이 40이 넘어 한학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면서 고산서원에 가서 주로 글을 읽었다. 고산서원에서 수백 년 전 안동 땅에서 대를 이어 학문을 연마한 선인들의 발자취가 느껴졌고, 그것은 필자가 한학 공부에 몰두한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필자의 한학 공부에 대한 염원은 초등학교 시절 고산서원에 소풍을 갔을 때 비롯되었던 것 같다.

During my childhood, I went to elementary school in the south-western part of Andong, where I often went to Gosan Seowon, located 2-3km away, for spring picnics. I went to Seodang before going to elementary school and learned a little bit of the taste of Hanhak. For the short young boy, Gosan Seowon was a large house and was considered to be a hall of classics in which a large adult had learned.

That’s why I went to Gosan-Seowon , while my studying for Hanhak, when I was over 40 years old. I could feel the traces of the ancestors who studied at the Gosan Seowon hundreds of years ago in the Andong land. Perhaps my desire for studying Hanhak studies originated when I went on a picnic at GosanSeowon in elementary school.

고산서원 앞 미천과 바위산

18세기에 대산 선생의 학문을 기리며 제자들이 건립

고산서원은 앞의 암산에는 붉은색 현무암 바위가 좌우로 우청룡, 좌백호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길지에 위치한다. 고산서원은 1800년도 안동의 대유학자로 존경받던 대산 이상정 선생을 기리며 후학들이 세운 서당이다. 지금도 매년 봄이면 유림들이 모여서 대산 선생에게 재를 지낸다. 현재 대산 선생의 8대 종손 이용원 선생이 일직면 망호리 마을의 종가를 복원하며 지키며 고산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의 15대손인 대산 선생은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학자이자 관리다. 대산 선생은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지만,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러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힘썼다. 현감의 직책을 수행한 지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교우들과 강론하고, 제자 교육에 전념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선생은 부임하지 않았다

Established by disciples in honor of the study of Daesan in the 18th century

Gosan Seowon is located in the front of the mountain where red basalt rocks are surrounded by the left and right mountains. Gosan Seowon is a Seodang that was established by students in honor of Daesan Lee Sang-jeong, who was revered as a great confucian in Andong in 1800. Even now, every spring, Yurim of the region gather to sacrtice to the scholar Daesan. Currently, the 8th Jong Son Lee Yong-won of Daesan is managing Gosan Seowon while restoring and keeping the Jongtak of Manghori Village.

Daesan, the 15th grandson of Mokeun Lee Sak, was a scholar and official in the late Joseon. Daesan was appointed to Yeonwonchalbang in 1739, but in September of the following year he abandoned his office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Since then, he has built Daesan Seodang, honed his studies and sought to educate disciples. Then, in 1753, he became a supervisor of Yeonil, trying to eliminate privatization and promote education. He tried to resign two years and two months after he held his post, but when he was not allowed, he left the office and returned home. Afterwards, he dedicated his studies only to teaching with his classmates and dedicated himself to discipleship. After King Jeongjo came to the throne, he was appointed to military service, but the teacher was not appointed.

대산 선생은 이理의
동정과 이기理氣의
선후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18세기 후학 양성하며 영남 이학파 사상적 기반 마련

퇴계 선생의 학맥을 이은 대산 선생은 학문을 연마하며 많은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퇴계 선생의 학통은 학봉, 장경당, 가람, 밀암, 유치명 선생으로 해서 18세기 이르러 대산 이상정 선생으로 이어진다. 대산 선생은 퇴계 선생 사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 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대산 선생은 외할아버지 이재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했다. 대산 선생은 이학파의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대산 선생은 이황의 존리尊理 중심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기호학파의 태도를 거부했다. 그런 한편 대산 선생은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했다. 특히 대산 선생은 이理의 동정과 이기理氣의 선후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해야 함을 강조했다. 대산 선생은 일상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학과 행의 일치를 추구하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대산 선생의 학풍은 동생 이광정과 남한조를 통해 유치명으로 이어졌다. 이후 이진상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으로 계승되었다.

Pivotal scholar of 18th century cultivation of Gi school

Daesan, who succeeded the Toegye’s school, sharpened his studies and focused on nurturing many after school. The Toegye’s schoolwork led to Hakbong, JangGyeongdang, Garam, Milam, and Yoo Chi-myung in the 18th century. Daesan is a pivotal figure in the Yeongnam Gi School, which led to Lee Hyun-il and Lee Jae-hee, who advocated the succession of Lee Hwang in the Yeongnam School, which was relatively stagnant compared to the Gi-ho School. Daesan was succeded Yeongnam Gi School through his grandfather Lee Jae. Daesan keeps up with Lee Hwang’s ideas, while winning and defining of the ideological ground.

Daesan maintains the position of Lee Hwang’s center of ” Keeping the Li ”. Through his writings 『Dogsunghakgibyoe』, he rejected the Gi-ho School attitude, which was regarded the two as equal . Meanwhile Daesan was against straightening, while accepting Lee Hwang’s existence as a ideology. In particular, Daesan had sympathy for li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understanding the real meaning while explaining the meaning of before and after of the Li-Gi.
He also focusing on the practical study of daily use, cultivating virtue rather than discussing the theory itself. Pursuing the unity of study and execution of Confucianism, he practiced it himself. Daesan’s academics was succeeded to Yoo Chi-myung through his brother Lee Kwang-jeong and Namhanjo. Later, his academics reached Lee Jin-sang and developed into a theory of YouLi theory. It was succeeded as Kwak Jong Suk in late Joseon Dynasty.

대산 선생은 1740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 교육에 힘썼다. 이후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교육 진흥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 사직이 허락되지 않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연마와 제자교육에 전념했다

대산 선생은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 문물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경학에 심취했다. 학문에 전념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저술로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을 남겼다.

As long as Daesan is working hard on scholarship, he will study the texts of the system such as sentences and rhythms. He was fascinated by the Chinese Classics. He is committed to learning and has written many books. Representatively, he wrote the books such as the 『Saryesangbyuntongo』, 『Yak-jung Pyeon』, 『Taedoseojeolyo』, 『Shimdongjung-do』, 『 LIGi-Hwi Pyun』, 『GyeongjaeZamjibTheory』, 『Shimmu-chulibTheory』, 『Joojaajulyo』, 『 Millam eachers’ Annual Report』, 『Shimkyung Gangnok Ganbo』, and 『Yeonpyeongdabmoonsuok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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