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 서애 선생의 배움과 위기의 조선을 구하고, 후세를 위해 기록한 징비록을 남긴 구국의 리더십을 배우고 인생의 비전을 세운다
가는 길 : 서울에서 안동으로 가려면 강남대로 내곡IC에서 지하도를 통과해서 30Km정도 간 후 초월IC에서 광주원주고속도로에 진입하여 51.7Km를 드라이브한다. 이후 신평IC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진입해서 128Km를 운전한 후 서안동JC에서 안동으로 빠진다.

Concept : We build a vision of life according to the education and the leadership of the Seoae who saved Joseon in crisis and left a 『Jingbierock』 for future generations.
The Way : To go to Andong from Seoul, go through the underpass at Gangnam-daero Naegok IC and go about 30 km. Then, enter the Gwangju-Wonju Expressway at Chowol IC and drive 51.7 km. Afterwards, enter the Jungang Expressway at Sinpyeong IC and drive 128 km, then fall off at Andong JC in Andong.

관광코스 1

서애 선생의 생가터 하회마을 종택 충효당

A. 서애의 종택 충효당과 교육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68

조선 중기 재상이었던 서애 선생은 임란 때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구국의 공신이다. 안동에는 서애 선생의 종택과 정자, 병산서당 등의 유적이 있고 옥연정사에서 기거하며 집필한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선생은 하회마을 양진당에서 태어났으니 양진당이 서애 선생의 태실이며 생가이며, 결혼 후 분가했다.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 선생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의 둘째 아들이며, 류운룡 선생의 아우다. 어릴 때부터 입암 류중영은 두 아들에게 『사서삼경』을 읽으며 글을 가르쳤고, 퇴계 선생 문하로 보냈다. 이 때 선생은 조목, 김성일 등과 공부했다. 퇴계 선생은 두 형제에게 천명과 마음자리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이때 서애는 형이상학적 학문을 다룬 주자의 『심경부주』를 읽었고, 이는 후에 화엄사상을 통해 신유학의 한 계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퇴계 선생은 구유학으로 노자, 장자 등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주자대전』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주자서절요』를 저술했다. 퇴계는 『주자서절요』를 통해 사욕을 제거하고 공익을 앞세워야 하는 관리의 덕목을 제시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퇴계의 공경정신이 서애 선생에게 이어졌다. 서애 선생은 정신적 스승인 퇴계로부터 백성공경의 정신을 배운 것이다. 또한 서애 선생은 전력, 도참설, 병법 등을 형 류운룡으로부터 배워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갖추었다.
특히 퇴계 선생은 두 형제를 가르치면서 서애 선생에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하늘이 낸 천재”라고 칭찬했다. 특히 퇴계 선생은 서애 선생의 형 류운룡에게 ‘똑똑함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라’는 뜻에서 겸을 호로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겸암 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화천서원의 당루가 ‘지산루’로 명명되었다.

Sightseeing course 1

Seoae Teacher’s Birthplace in‘Yangjindang’ and Jongtaek ‘Chunghyodang

A. Chunghyodang, Jongtak of Seoae and education
Address : 68 Jonga-gil, Pungcheon-myeon, Andong-si

Seo-ae, Prime Minister of the mid Joseon-dynasty period, was a great leader on the nation that made a great contribution in overcoming the difficult situation during the war. In Andong, there are relics of Jong-taek, Jongsa, and Byeongsan SeoWon of Seo-ae, and 『Gingbi-rok』 and 『Seo-ae-jib』, which were written by Seo-ae who lived in Okyeonjeongsa, are invaluable materials for the study of Imjin War History. Seo-ae was born in Yangjindang, Hahoe Village, and Yangjindang was the birthplace of him.
Chung Hyo-dang is Jongtaek of Ryu Song-ryong. Seo-ae is the second son of Ryu Joong-young, an governor of the Whanghae-do Province, and the brother of Ryu youn-yong. From a young age, Ryu Joong-young taught her two sons by reading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sent them to study under Toegye’s academia. At this time, the teacher studied with Cho Mok, Kim Seong-Il. The Toegye also taught the two brothers about heaven’s spirit and mind. At this time, he read 『Shim KyungBu-ju』 of a Jusa who dealt with metaphysical studies, which later led to the formation of a school of neo-Confucianism through the Hwaeum Thought. Toegye studied 『JusaDaejeon』 in the judgment that he could not overcome the metaphysical world of Jusa and Jungsa by confusianism, and wrote the book 『Jusaseojeulyoe』. Toegye presented the virtue of management to remove desire and put public interest ahead through 『Jusaseojeulyoe』. The honorary spirit of Toegye, who is loyal to the country and honors his parents, was followed by Seo-ae. Seo-ae has learned the spirit of honoring people from Toegye, a spiritual teacher. In addition, Seo-ae has learned the knowledge, wisdom, and techniques from her brother Ryu Youn-yong to have the knowledge and wisdom necessary to overcome the imjin war.
In particular, the Toegye praised Seo-ae, saying, “If you study one, you are a genius from heaven who knows ten.” In particular, Toegye gave a humble name ‘Gumam’ to Seoae’s elder brother Yoo Youn-yong in the sense of “Be humble without being pompous.” So Hwacheon Seowon’s Dangru, in honor of Gumam, was named Jisanru.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충효당 전경

B. 관직에 나가 의와 구국 정신에 입각해 정책 결정을 내리고

명종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한 서애는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에 들어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선조 2년 1569년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로 출장을 다녀왔다. 이때 서애는 학덕과 인품으로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서애는 이조 정랑이 되어 인성 대비가 임종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을 주장하였으나 류성룡은 적손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시행되게 했다.
이후 서애는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아 조정에서 관리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서애는 상주 목사로 나가 지역민을 예절로 다스렸다. 그 즈음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였으며, 이때 함경도 관찰사·성균관 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서애도 당시 붕당정치에 의해 반대파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물러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예조판서로 재직할 때 의주 목사 서익이 서애를 간신이라 탄핵하자, 서애는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칩거했다. 그러나 곧 형조판서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가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예조판서에 이르러 옥사가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서애를 이조판서에 등용하고,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는 한편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에 봉하였다.
우의정에 봉직하며 서애는 정철의 처리를 놓고 동인 내에서 “정승을 역임한 고관이라 죽일 수는 없다” 라고 선처를 호소하며, 북인을 대표하는 이산해, 정인홍과 대립했다. 이 일로 인해 동인 내에서 죽음을 통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강경파인 북인과 유배를 주장하는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이 일어났다. 서애는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던 즈음 정철과 서인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면서 정철 처벌은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 처벌에는 반대했다. 또 다시 큰 옥사가 발생하여 나라의 인재들이 대거 학살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국가 리더로서의 소임을 소신껏 펼쳐간 것이다.

B. Go to office and make policy decisions based on righteousness and the spirit of nationality.

In 1564, Seo-ae, who passed Samasi, passed through the special poetry in 1566 and entered Hanwon and be a hwanjibujungsa in Syunmoonwon. In the following year, he served as a censor of the courts of the Yeon-gwan and Chun-chu-gwan. He also served a Seojungwhan at Seonjulsa in second year of Seonjo and came to Ming Dynasty. At this time, Seo-ae is called “Seo-ae Teacher” and is respected by the Ming intellectuals. When Insungdaebi, grandma of the King, was died in the time of his tenure of Izojungrang, but Ryu Sung-ryong insisted on funeral of the 3-year following the example of legitimate son.
Seo-Ae took over positions such as contest examiner, Zikgaehak, Bugaehak, Dosyungsi, Daesaheon, and Daejaehak and demonstrate his capabilities. In particular, Seo-ae went to Sangju as a pastor and governed the local people with manners. At that time, he took care of her mother’s illness in his hometown, and he was appointed to the Whanchalsa of Hamgyeongdo and the Daesasung of Sungkyunkwan, but he did not go out.
Seoae also repeatedly impeached by the opposition of the bandung politics. When Seo-ik, the pastor of Uiju, impeached Seo-ae as a bas official, so he sought to retreat and went to his hometown for three years. But he was soon called to be a minister of law and went to government to serve as a Daejaehak. In 1590, when the prison and jail arose, many of the officials and their names appeared in the writings of the sinners and he asked himself to withdraw. However, the King Sunjo enlisted Seo-ae in the minister of Culture then promoted to Uuijeong, and sealed him to Pungwon Buwon-gun as third place in Gwang-guk Public Trust.
While serving in Uuijeong, Seo-ae appealed to the King over the treatment of Jeong Chul and said that he could not be killed because he was a senior officer who served as a high official. This led to a split between the hard-liners North and the moderate South alleged exile in the Eastman that they had to solve the grudges of those who died unjustly through death. Seo-ae agreed on the punishment of Jeong-Chul and Seo-in when he served as the Jayeyujung and the Yijophanseo, but he did not agreed to punish all the man of Seo-in. Again, he represented his philosophy of evading the case of big prison event, and as a national leader, he wanted to prevent the mass destruction of the country’s talents.

서애 종택 충효당 당호는 당시 명필 허목의 글씨다

C. 임란에 대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장수를 육성하며

특히 서애가 좌의정으로 재직할 때 왜가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이에 영의정 이산해는 국서의 묵살을 주장했지만, 류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 조정에 보고를 주장했고, 그대로 실시했다. 이 일은 훗날 왜와 명이 강화회담을 할 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류성룡은 권율, 이순신, 신충원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를 지키는 보루가 되게 했다. 이때 이순신은 전라도,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각각 배치되었다. 그 결과, 왜란 중 이순신이 왜와 싸웠을 때 백전백승하며 국난 극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애는 4도 도제찰사로서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 조정을 총지휘 했다. 이때 서애는 선조를 모시고 송도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왜란에서 신립이 대패하여 파천 논의가 이루어지자, 그 형인 신잡이 거센 항의를 하고 이후에 송도로 파천한 후 천도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이산해의 치죄를 강력하게 주청하여 이산해와 류성룡을 파직시킨다. 서애는 그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일부 신하가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는 북행에 대해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서애는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가 조선을 구하는 길을 열었다.

한편 왜의 군사적 도발을 예감한 서애는 이 같은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국가재원을 투입했다. 서애는 이듬해 도체찰사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량을 준비했다. 이때 명의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파주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궁지로 몰아붙이고 왜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기도 했다.

특히 1597년 이순신이 류성룡의 반대파로부터 역모를 당했을 때, 서애는 선조 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하였다. 이에 선조는 1월 류성룡을 경기 지방에 보내 순찰토록 했다. 류성룡이 한달 뒤 돌아와보니, 조정에서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에 류성룡은 사직을 결심하고 그 해 2월부터 4월초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원익, 정탁 두 사람만이 이순신을 옹호하였고,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정유재란 중 명랑해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조선을 또다시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C. To strengthen defense and prepare for brave general

In particular, while in jayeyujung, Seo-ae have a document from Japanese to send their troops to the Ming Dynasty. At the time, Young Eui-jung, Lee Sang-hae insisted on the dismissal of the national document, but Ryu Sung-ryong insisted on reporting it to the Ming Danasty. This later led to the dissolution of the Ming dynasty’s doubt about Joseon when Wae and Ming later talked about Ganghwa.
And in 1591, before the imjin war, when the King Suncho asked him to recommend the master, Ryu Sung-ryong recommended Kwon Yul, Yi Sun-sin and Shin Chung-won, who later became the country’s man in the future. At this time, Yi Soon Shin was placed in Jeolla Province and Won Kyun in Kyungsang Province, respectively. As a result, during the war, General Yi Sun-shin won the battle with Japanese, and made a decisive contribution to overcoming the national disaster.

When the Imjin War broke out in 1592, Seo-ae was a governor of four province, who was in charge of the Joseon Dynasty in the midst of conflict and war. At this time, Seo-ae came to Song-do with the King Suncho. However, when the New World was defeated in Wauran and discussions were held, the brother-in-law protested strongly, later retired to Songdo, and strongly appealed to the charges of the discrete seas that claimed Cheondo as the first to destroy the discrete seas and Yu Sung-ryong. Seo-ae resigned that day and calmed the refugees who caused the disturbance in Pyongyang. At this time, many people talked about going north through the Yalu River to the Ming Dynasty, but Seo-ae insisted on going to Uiju alone, opening the way for the Ming to save Joseon in the future.

In anticipation of military provocations, Seo-ae insisted that a defense security system must be properly established in order to prevent such a move. In the meantime, training centers were set up, and national resources were invested in expanding the military, including the manufacture of firearms, the shrinking of castles, and the training of soldiers. In addition, despite the opposition of the mediation in order to increase the longevity, the names such as Yi Sun-shin and Kwon Yul were used. In the following year, Seo-ae became the governor of the province, caring for the people and preparing the army. At the same time, he met Lee Yeo-song, the general of Ming, to provide the convenience of combat, while advancing to Paju, pushing the lijinwharan to the corner, and grasping dozens of espionage in jeopardy.
In 1597, when Yi Sun-shin was confronted by Ryu Sung-ryong’s opponents, Seo-ae directly defended Yi Sun-sin in front of the king Soncho. The king Sonsho sent Ryu Sung Ryong to Gyeonggi Province for patrol in January. When Ryu Sung-ryong came back a month later, the court made Yi Sun-shin a sinner. So Ryu decided to resign and filed his resignation more than 10 times from February to early April of that year. At this time, only two people, Lee Won-ik and Jeong Tak, defended Yi Sun-shin, and Yi Sun-shin barely escaped his beheaded and participated in a white coat. After his reinstatement, Yi Sun-shin survived and successfully commanded a cheerful naval battle at Myungrang during the Jongyoojaeran and saved Joseon from the crisis.

서애의 15손 류창혜씨가 길사를 봉행

D. 구국 일념과 학덕으로 임진왜란 중 조선 분할과 할거의 위기를 극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 군사를 이끌고 주도한 조선 침략의 목적은 조선의 반을 차지하는 할지였다. 명은 왜로부터 방어선이 되는 조선의 분할을 원했다. 명과 왜의 이해관계가 얽힌 분할과 할거 전략은1592년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592년 7월 16일 명의 1차 원군 조승훈군이 평양전투에서 패전하고 명으로 돌아간 후 명은 왜의 실력을 실감하게 된 계기다. 이로 인해 명은 일본통 심유경을 유격장군으로 발탁하고, 왜와 화해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이 때 강복산회담에서 심유경과 대담한 코니시 유키나가는 분할과 할지를 골격으로 하는 강화7조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명과 왜는 조선 조정을 철저히 배격하고 물밑회담을 벌였다. 명과 왜의 조선분활 회담은 1593년 4월 8일 2차 용산회담으로 이어졌고, 이후 4월 20일 왜는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철수하는 왜를 공격하려던 류성룡의 계획은 명에 의해 저지되었고, 이후 조선군의 전투행위는 금지되었다.

그 이유는 2차 용산회담의 협약내용 때문이었다. 이후 6월 28일 일본 규슈에서 진행된 3차 회담에서 ‘조선할지와 이를 위한 왜의 서울철수와 명의 철수, 그리고 명의 강화사절 일본 파견과 기타 조선 2왕자의 반환 등’의 2차 회담 내용이 밝혀졌다. 일본에서 이뤄진 5월 23일 3차회담에서 히데요시가 명의 사절과 대면하며 강화회담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는 야비하게도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1593년 6월 19일 진주성 공격전을 하며 야만적인 살육전을 벌였다. 이후 히데요시는 다시 ‘강화7개조’를 명 사신 앞에 내놓았다.

강화 4조에서 함경, 평안, 황해, 강원 4도를 조선 국왕에서 돌려주고 경기 남쪽과 충청, 전라, 경상 4도를 왜가 차지하겠다고 하고 이를 할지라 칭했다. 특히 왜는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명의 속국이기 때문에 조선 할지는 명과 협의하여 요구한다는 논리로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제안한 7조 강화교섭은 왜곡과 시간적 지체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1597년 교섭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그리고 1597년 2월 21일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 4도 할양을 목적으로 14만5천명의 왜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정유재란 중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가 추구하는 조선 할지 시도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온 사실은 왜란 중 명이 조선직할통치를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명이 조선에 관원을 파견해서 직접적으로 조선을 다스리겠다’는 계획이다. 이 때문에 명군은 전쟁이 끝난 후 1600년 2월까지 조선에 주둔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애가 기록한 『징비록』 ‘임진왜란 관련 기사’에서 나온다.

얼마 후 선조 26년인 1593년 11월 명은 사헌을 사신으로 보내서 황제의 칙령을 조선에 널리 알리고 조선의 사정을 면밀히 살폈다. 이때 황제가 보낸 칙서를 보면 당시 명과 조선의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근자에 왜적이 한 번 들어오니, 이내 왕성을 지키지 못하고, 들판에는 해골이 질펀하고, 종묘의 사직은 빈터가 되었다. 그렇게 패망한 원인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어찌 운수라 하랴! 임금이 오락을 좋아하고, 소인을 신임하고, 백성을 규휼하지 아니하고, 군비를 소홀히 하여 도적을 부른 것이다.

이제부터는 존망과 치란의 기틀이 오직 임금에게만 있고, 짐에게 있지 아니하니, 경계하고 삼갈 지어다.”

칙서 선포가 끝나고 사신 사헌으로부터 칙서를 받아든 선조는 그날 저녁 류성룡을 대궐로 불러서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일찍 자리를 물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일 사신을 보고 선위하려고 한다. 경을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비록 밤이 깊었으나 경과 대면하고 나서 결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렀다.”
류성룡은 선조가 이렇게 나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위학증의 ‘분할역치’를 중국 조정의 의견이라고 전할 때 선조는 주본을 내보이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선조의 생각에 대한 류성룡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것은 이치에 당하지 않는 망령된 소리입니다. 명나라 조정의 그런 망령된 사설에 어찌 흔들리겠습니까? 원컨대 의혹되지 마시고,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에만 힘씁시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본에 비교되지 않는 황제의 칙서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류성룡은 선조와 생각이 달랐다. 그에게 ‘분할’, ’역치’라는 말은 가당하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망언이었다. ‘아무리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이라 해도 그렇게 마음대로 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신념으로 서애는 선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결코 뜻을 요동하지 마십시오. 내일 사신 앞에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늘 명과 접하는 류성룡도 공맹의 도를 주창하면서 가장 비공맹적인 행태를 지닌 나라가 명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류성룡은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지금 물러나면 조선의 독립은 사라지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지는 것이다. 조선의 땅도 마음대로 가르고, 임금도 마음대로 바꾼다면, 조선의 백성도 사라지는 것이다. 조선이 땅도, 임금도, 백성도 사라지는 데 지금 왜와 왜 싸워야 하는가?

류성룡은 ‘명이 이웃나라에 대한 예우가 없다면 종주국 중국이 왜와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하며 철저히 내정불간섭주의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류성룡의 이러한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다음 날 사헌에게 자신이 친히 쓴 서첩을 끄내어 양위서를 제출했다. 이를 받은 사헌은 당나라 숙종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마땅히 황제에게 주문하여 명 조정의 조치를 기다리도록 했다. 명의 역치 시도는 선조가 양위서를 제출함으로써 일단 단락을 맺는 듯 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영수인 영의정 류성룡은 그렇게 쉽게 나라의 명운을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 당시 명군의 초기 지휘부는 모두 명으로 돌아갔지만, 유격장군 척금이 명군의 대표 겸 지휘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척금은 왜를 여러 번 격퇴한 척계광의 조카로 천성이 착하고 감이 빠른 장군이었다. 척금은 사신 사헌이 서울에 들어올 때 영접을 하고 그와 함께 처소에 기거하며 명과 조선 사이에 이뤄진 모든 일을 주지하고 있었다.

이때 협상 당사자는 명 조정이 아니라 명군의 지휘부였다. 명나라 사신 사헌이 ‘조선을 나누고 임금을 바꾼다’는 분할역치의 교서를 선조 앞에 공공연히 들이대었다. 이때 전시 수상이자 도체찰사였던 류성룡은 독립된 국가로서 조선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용기와 지혜로 맞서는 구국 리더십을 발휘하며 난국을 타개했다. 약소국의 신하였지만, 조.명 연합군으로 왜에 대적하고, 명에 대해서는 논리와 지략으로 왜와 아무런 협약을 할 수 없도록 명의 사신을 설득해야 했다

그날 밤 류성룡은 척금이 임시로 기거하는 거처에 와서 그와 마주했다. 좌우 시중 드는 사람과 통역관도 모두 물리치고 가운데 탁자를 놓고 탁자 위에 초 두 자루와 종이, 볏, 벼루를 높았다.
이에 척금이 붓을 들어 썼다.
“국왕은 마땅히 전위를 빨리 해야 한다.”
이에 류성룡이 다시 붓을 들었다.
“조선의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그대도 많은 책을 읽었을 터이다. 어찌 고금의 일을 듣지 못하였는가? 지금 우리나라는 지극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전위를 해서 군신 간 부자 간 잘못이라도 생긴다면 이야말로 재앙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류성룡이 쓴 글을 읽고 난 후 척금은 오랫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 서애를 응시했다. 그리고 붓을 들어 류성룡이 쓴 글 밑에 “시시 是是 시시 是是, 옳습니다 옳습니다”를 연속 쓰고 있었다.
이는 자신이 서애의 말에 동의하며 승복한다는 의사 표현인 것이다. 그는 필담을 나눈 종이를 모두 불태우고 다시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 문제는 사신 사헌이었다. 척금의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나 열쇠를 진 자는 사헌이었다. 사헌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명 조정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조선의 임금을 바꾸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는 것이 서애의 판단이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류성룡은 재빨리 조정의 신료들을 모두 모았다. 조정의 일치된 의견을 사헌에게 보여주며, 조선의 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쟁 중인 만큼 사헌의 역할 또한 보통 사신의 역할과는 다른 것이다. 일개 사신에게 지나친 예우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이 서애의 판단이었다. 류성룡은 백관을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섰다.
서애는 진지하게, 수천 수백 마디의 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했다. 그날 밤 척금은 류성룡에게 말했다.
“이제 사신이 뜻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국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신은 7일 만에 조선을 떠나 명으로 돌아갔다. 그 7일 동안 류성룡은 사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궁구했다. 서애는 신하의 도리와 공맹의 예를 갖추어 사신과 척금에게 진심을 정성껏 토로하는 정법을 택한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부친을 통해 읽힌 사서삼경의 인의예지신 철학과 퇴계를 통해 익힌 주자학의 본령을 자신의 학덕과 지기를 통해 전달한 것이다. 서애는 자신의 심성과 지성을 만든 성학의 본령을 통해 주자학을 익히고 실천하는 두 장수에게 백관과 함께 조선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D. Overcoming the crisis of Joseon’s division and splitting during the Imjinwharan based on the academic wisdom and patriotic spirit

The purpose of the invasion of Joseon, led by Toyotomi Hideyoshi, led the 150,000 army, was to occupy half of Chosun, and the name was the division of Joseon, which became a defensive line from the Japan. The division and strategy of intertwining the interests of the Ming and Japan began with the war in 1592. In 1692, after the first 16th Cho Seung-hoon defeated the Pyongyang battle and returned to Ming , Ming realized the power of Japan. This led to Ming Yoo Shim-Kyung being selected as a shortstop general, which led to negotiations with the Japan At the Kang-boksun meeting, Shim Yoo-kyung and bold Konishi Yukinaga presented Reinforcement Article 7, which is based on the division and the spilit. In the process, Ming and Japan strictly rejected the Joseon Dynasty and held a water talk. The Myong-Japan Joseon Segment Talks led to the 2nd Yongsan Talks on April 8, 1593, and then withdrew completely from Seoul on April 20. Ryu Sung-ryong’s plan to attack the withdrawing Japan was blocked by the Ming after that.

The reason was the contents of the agreement of the 2nd Yongsan Talks. Later, in the third round of talks held in Kyushu, Japan, on June 28, the 3th round of talks, including Joseon’s splitting and withdrawal of Japan and Ming in Seoul, and dispatch of Ming’s delegation to Japan and the return of two Joseon’s princes. At the 3rd meeting of May 23 in Japan, Hideyoshi confronted the Ming’s delegation and held a reinforcement meeting. In the process, however, Hideyoshi rallied to take advantage of the high ground at the talks, and again fought a barbarous assault on June 19, 1593 at Jinjoo Castle. Afterwards, Hideyoshi again brought out the ‘Enhancement Seven Pieces’ in front of the Ming’s delegation.

In Ganghwa 4, the 4 Hamgyong, Pyeongan, Hwanghae, and Gangwon provinces were returned from the king of Joseon, and they said Japan would occupy the 4 southern part of Gyeonggi, Chungcheong, Jeolla, and Gyeongsang provinces. Particularly, they negotiated with the logic that they would ask for the acceptance of Ming because Joseon is a subordinate country to the Ming , rather than an independent country.
However, Hideyoshi’s proposed Article 7 reinforcement negotiations were not properly transmitted through distortions and time delays, and the negotiations were completely destroyed in 1597. On February 21, 1597, Hideyoshi invaded Joseon again with 145,000 Japanese troops for the purpose of reintegrating 4 Joseon’s provinces . The death of Hideyoshi closed the trial of Josoen’s division Japan pursued.

But what was even more surprising was that Ming was trying to rule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Imjinwar. The plan is that ‘Ming will send officials to Joseon and directly rule it.’ For this reason, the Ming Army was stationed in Joseon until February 1600 after the war. This fact is also found in the book on 『Jingbirock』, written by Seo-ae.

A short time later, in November 1593, the 26th year of the king Suncho, Ming sent a envoy, spreading the Emperor’s decree to Joseon and closely examining Joseon. The edict sent by the emperor reveals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oseon at that time.
“When the Japanese army enters the roots at once, he cannot immediately protect the royality, the skull is in the field, and the jongmyo shrine becomes a vacant lot. Looking back at the cause of such destruction, how can it be called luck! The king enjoyed entertainment, trusted the villain, did not condemn the people, neglected his arms, and called on the thief.

From now on, the framework of honor and management of war rests only on the king, not on me. and watched and restricted.”

The king Suncho who fled to Uiju during the Imjin War were returned to Seoul in October 1593 for a year and a half. The ancestors were honored to decide whether or not to execute the division threshold derived from the main text of the gastrointestinal tract during pre-wounding death. At this time, the monarch insisted on the top of Nam-Shin, who delivered the emperor’s decree, showing the height of the arrogance and disrespect of the monarchy. In the end, the monarch was seated in the face of the ancestors, and the king was interviewed by the king. And he proclaimed the rule and urged him to give up his place quickly.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edict, the king Suncho who received the edict from the envoy, called Ryu Sung-ryong into the palace and said that evening.
“I knew that this would happen. It is sad to be unable to leave early. I’m going to see the envoy tomorrow and preside over my kingship. It is the last day to meet you. Although the night was deep, I wanted to break up after meeting face to face. So I called you like this. ”
Ryu Sung-ryong guessed that king Suncho would come out like this. The king Suncho, while already presenting the “splitting threshold” of edict, said it was the opinion of the Ming’s court. But then and now, Ryu’s answer to the king’s thoughts was firm.
“This is a ghostly sound that doesn’t make sense. How can you be shaken by such a ghostly editorial of the Ming Dynasty? Don’t be suspicious, let’s just work on what we should do. ”

But this time the Emperor’s Order was given, which is not compared to the edict. However, Ryu Sung-ryong was loyal to the king Suncho. The words ‘split’ and ‘threshold’ were not acceptable to him, and it could not be. Seoae firmly told the king Suncho with the belief that ‘no matter how Ming is the dominant country of Joseon, it is not a country that can change the king at will’.
“Never let your mind fluctuate. You should never say that you will preside over in front of the envoy tomorrow. I dares to die to say this to you ”
Although he said it, Ryu Sung-ryong, who was always in contact with the Ming’s people, even though it advocated the way of the alliance, was realizing that the country was the most unconfucius. Ryu could not retreat anymore. If he retire now, independence will disappear and the country of Joseon will disappear. He thought.
“If the land of Joseon’s land is divided freely and the king is freely changed, then the people of Joseon will disappear. And then, why do we fight against the disappearance of land, kings, and people?”

Ryu Sung-ryong was willing to stick around the internal interference without thinking, “If the people don’t have respect for neighboring countries, what is it different from China?”
However, despite Ryu Sung-ryong’s pious obstacle, the king Suncho brought out a letter of intent to the envoy the next day and submitted it. Receiving this, the delegation quoted Sukjong’s testimony and ordered the emperor to wait for the actions of the Ming’s court. Attempts by the Ming’s threshold seemed to have a short paragraph after the king Suncho submitted his will.

However, Yeong-ui Jung Ryu Seong-ryong, the leader of the Joseon Dynasty, had a firm belief and will that he could not give up the country’s destiny. At that time, all of Ming’s early commanders returned to his country, but Short Range Troops served as Ming’s representative and commander. Chukgeum was a nephew of Cheek Gye Kwang who defeated Japanese army many times. Chuck-geum accepted the envoy’s official activities when he entered Seoul, stayed with him in his residence, and heeded all that had been done between Ming and Joseon.

At this time, the negotiating parties were not Ming’s court but commanders of the army. The Ming Dynasty reaper publicly introduced the divisional threshold of “dividing Joseon and changing the king” before the king Suncho.
At this time, Ryu Sung-ryong, as a prime minister during the war and governor of the province, overcome the impoverished nation with his courage and wisdom in order to defend the fate of Joseon as an independent country. Even though he was an official of the lesser nations, but he had to convince the reaper, so that they could oppose the Japanese army with allied forces, and they could not make any agreement with the Japan in accordance with the logic and intelligence.

That night, Ryu Sung-ryong came to a temporary dwelling place which Chukgeum lived in and faced him. Both the left and right attendants and interpreters were defeated, and the table was placed in the middle, placing two candles, paper, crests, and the sack on the table.
The Chuckgeum wrote with a brush.
“The king must be quick to move forward.”
Ryu Sung-ryong raised the brush again.
“As a servant of Joseon, I can’t hear you. You would have read all books. How could you not hear the truth of old Saint? Now my country is in extreme danger. If we save our country from a crisis, what we had to do? If the king preside over the position, and it’s a miscarriage between the king and the official, that’s what adds to the disaster. ”
After reading Ryu Sung-ryong’s writing, Cheukgeum opened his eyes for a long time and stared at Seo-ae. And he was writing a brush under the strings, “Shi 是 是 Sissi 是 是, right is right” was written continuously.
It is an expression that he agrees and surrenders. He burned all the papers he shared with him and said nothing again.

The last problem was a reaper ‘Sahyn’. He changed the mind of the Cheukgeum, but it was reaper who took the key of the threshold. Unable to change the mind of ‘Sahyn’ could not change the mind of Ming court. However, it was Seoae’s judgment that changing the king of Joseon during the war was unfair.
When the thought came to him, Ryu Sung-ryong quickly gathered all the officials. He wanted to show Joseon’s heart by showing the consensus on the court. As in war, the role of the reaper is also different from that of ordinary times. It may be an excessive courtesy to a reaper, but it was Seoae’s judgment that he could not overcome the difficulties without doing so. Ryu Sung-ryong led all the officials and stood in front of the reaper ‘Sahyun’.
And he explained why Joseon had reached this level.
Seoae seriously conveyed the truth through hundreds of thousands of words. That night, Chuekgeum told Ryu Sung Ryong.
“Now the reaper has changed completely. You don’t have to worry about the king anymore.”

The reaper left Joseon in seven days and returned to Ming. During those seven days, Ryu Sung-ryong took the situation and looked for ways to reverse it. Seo-ae has chosen the law of heartfelt devotion to the reaper ‘Sahyun’ and ‘Cheukgeum’ with the example of officials and alliance.
He presented the philosophy of confucianism and sincerity, which he learned through the father’s and Toegye’s teaching and practice in accordance with his wisdom and knowledge. The spirit of Joseon, along with all the Joseon’s official, was delivered to the two Ming’s official who learned and practiced Confucianism through the Seoae’s spirituality and intelligence.

충효당이 소재한 하회마을의 골목어귀

E. 탄핵으로 관직 물러난 후 1600년 복권, 낙향하여 후세를 위해 『징비록』 집필하고

서애가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1598년 다시 명의 장수 병주부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한다”고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류성룡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명 조정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서애는 고향에 낙향하여 은거하며 하회마을 건너편 옥연정사에서 『징비록』 집필에 몰두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600년 복권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 무렵 류성룡은 친형과 모친이 잇따라 별세하는 한편 아들과 큰조카, 제자 김홍미의 죽음 등 가정적으로 큰 우환을 겪으며 인생사의 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서애는 칩거에 들어간 7년 후인 1607년 5월 3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서애 선생은 풍산읍 서미리 삼간초옥에서 별세했다. 선생 사후에 문하생과 유림들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충효당을 건립했다. 당호 충요당은 서애 선생이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당대 명필가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다. 한편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학문 높은 두 선비 류운룡과 류성룡 두 형제는 퇴계 이황의 퇴계학을 이어받아 서애학파라는 가학을 형성했다. 류성룡이 영의정이 되고 공신이 됨에 따라, 풍산 류씨는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되었다.

E. After retiring from impeachment, he lottery in 1600 and wrote 『Jingbirock』 for future generations.

In 1598, when Seoae served as Yeong-Eui-jeong, Chung Eung-tae, a long-term veteran governor, said, “Why Joseon attracts the Japanese and attacks the Ming Dynasty.?” At this time, Ryu Sung-ryong was sentenced to impeachment by Bukin because he did not go to the Ming’s court to explain the truth of the case.
Afterward, Seo-ae retired to his hometown and immersed himself in the writing of 『Jingbirock』 at Okyeonjeongsa across Hahoe Village. Two years later, he was lottery in 1600 and called several times in court, but he did not respond at all. At this time, Ryu Sung-ryong’s brother and mother died and at the same time, his son, nephew, and disciple Kim Hong-mi also died. He received a great deal of domestic misfortunes, so that he got the awakening during the life for those years.

Seoae died on May 31, 1607, seven years after he entered seclusion. Seo-ae, who lived plainly for a lifetime, died at a thatched house in Seomi-ri, Pungsan-eup. After his death, disciples and Yurim established Chung Hyo-dang in memory of his virtue. Dangho Chungyodang derives from Seo-ae’s emphasis on loyalty to the country and filial parents. The board written ‘Chunghyodang (忠孝 堂)’ hanging on Daecheong Chae was written by Hurmok (1595 ~ 1682). Two representative scholars of Hahoe Village, Ryu Woon-ryong and Ryu Sung-ryong, inherited Toegye’s school. As Ryu Sung-ryong became Young-ui-jeong and public trust, Pungsan Ryu became a representative family of Andong.

서애 선생의 학문과 구국의 정신을 기리는 후학들의 완성한 병산서원

병산서원의 만대루

관광코스 2

학문연마와 후학양성의 터 병산서원에서
주소 :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A. 서애 선생과 삼남 류진 선생을 배향한 후학양성의 터 병산서원

충효당에서 하회마을을 돌아나와 15세기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충신 서애 류성용 선생을 배향하는 병산서원을 찾아간다. 하회마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하회마을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다. 학문의 경지를 이루고 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 힘들게 연마하고 청렴하게 수양하며 살아간 서애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포장하지 않고 흙 길로 두었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 선생과 선생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1572년 류성룡 선생이 지방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현재의 병산 서원자리로 이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서당을 1607년 다시 중건하였고, 1614년 사당인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으로 변모했다. 1620년 서애 선생의 위패가 안동 동쪽의 여강서원으로 옮겨졌다가, 1629년 다시 이곳으로 모셨다. 병산서원은 1863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보존되었다. 일제시대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 그리고 사당은 1937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서애 선생의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동 뒷산에 있으며, 안동의 병산서원, 빙계서원, 남계서원, 삼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 땅의 2천년 역사 기간 동안 난세에 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류성용 선생은 한반도 역사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나라를 경영하고 지기를 발휘한 큰 인물이다.

Sightseeing course 2

At Byungsan Seowon, the site of academic study and education
Address : 386, Byeongsan-gil, Pungcheon-myeon, Andong-si

A. Byungsan Seowon, the site of disciple’s education, facing Seo-ae and 3th son Ryu-jin

After leaving Hahoe Village from Chunghyodang, we visits Byeongsan Seowon, where Sung-yong Ryu, a former national loyalty teacher, saved his country from the 15th century Imjin War. The road to Hahoe Village, a 10-minute drive from Hahoe Village, is a dirt road. The villagers deliberately left unpaved dirt roads in order to support the will of the Seoae, who lived hard and polished and fostered in order to achieve the status of scholarship and the path of truth.

Byeongsan Seowon is a representative Confucian architecture in the Joseon Dynasty, and is a Seowon oriented toward Ryu Sung-ryong and Ryujin, the third son of the teacher. In 1572, when Seong-ryong Ryu served as a district officer, he moved to the current area of Byeongsan Seowon. The Seodang, which was lost due to the Imjin War, was rebuilt in 1607, and in 1614, the shrine was built and transformed into Seowon. In 1620, the teacher’s plaque was moved to Yeogang Seowon in the east of Andong, and he returned to this place in 1629. Byeongsan Seowon was promoted to Seowon in 1863 and was preserved when Daewongun abolished Seowo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ssive renovations were made, the auditorium was built in 1921, and the shrine built in 1937.
Seoae’s cemetery is currently located in the back hill of Pungsan-eup, Andong-si, and has been cultivated in Byeongsan Seowon, Bingye Seowon, Namgye Seowon, and Samgang Seowon in Andong. During the 2000-year history of this land, Ryu Sung-yong, who became a revival of a country and saved Joseon from the crisis, is a big figure who managed and built a nation to continue the history of the Korean Peninsula.

서애 선생을 배향하는 병산서원의 사당

B. 임진왜란 초 호종하여 평양으로 피난, 의병 일으켜 어가를 돌려 한양으로 돌아와 독립국의 위상 지켜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조선에 침입하자 서애 선생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군무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이 때 서애 선생은 하회마을로 돌아와 형 류운룡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되, 일본군을 피해 태백산 용수사로 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은 류성룡은 선조대양의 어가를 모시고 국경까지 피난을 갔다. 그러나 서애 선생은 선조 임금에게 “중국으로 가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고 고했다. 그리고 승병과 의병을 일으켜 어가를 돌려 한양으로 돌아가 나라를 구했다
특히 서애 선생은 왜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이순신과 권율 등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을 등용하였다. 그리고 직접 관서 도체찰사직을 역임하여 되어 안주에 머물며 군량을 준비하면서 명 장수 이여송에게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며 왜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후 서애 선생은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고, 그 뒤 충청. 경상. 전라 삼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그 뒤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하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했다. 서애 선생은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또한 나라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사람을 귀히 여겼다. 뜻을 세워 관직에 나가 나라를 구한 서애 선생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배움을 즐겨하였다. 특히 서애는 류운룡 선생과 퇴계 선생의 학문과 지기를 배우고 익혔다. 그런 덕분에 선생은 도학, 문장 ,덕행, 글씨에 뛰어나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이름을 떨쳤다. 특히 퇴계 제자인 서애는 학문 연구를 통해 지략과 혜안을 키운 리더다. 류성룡 선생은 은퇴 후 형 류운형과 함께 나란히 부용대에 정사를 건립하여 교류하며 각자 학문을 연마하는 가운데, 후세를 위해 『징비록』을 집필했다.

B. Whiling had been following the king and evacuating to Pyongyang, raised a soldier and returned to Hanyang to protect the status of an independent nation

When Japan invaded Korea on April 13, 1592, Seo-ae served as a military minister and oversaw the military affairs. Subsequently, he was dismissed after being impeached by the opposition that he became a court of spirit and led the king Suncho and to Pyongyang. At this time, Seo-ae returned to Hahoe Village and told her brother Ryu Un-ryong, “Embed your mother and evacuate.
However, Ryu Sung-ryong, who was called by his ancestors again, fled to the border with the king. But Seo-ae told the king Suncho, “If you go to China, you cannot protect your country.” Then he raised soldiers to return to Hanyang to save the country.
In particular, Seo-ae insisted that a defense and security system must be properly established to fundamentally prevent the military provocation. Therefore, training centers were installed to focus on expanding the military, such as making firearms, contracting castles, and training soldiers. In addition, Yi Sun-shin and Kwon-yul, such as power was recruited. In addition, he served as the official dojaechalsa and stayed in Anju, preparing the army, giving Myeongjang Yi Yeo-song a map of Pyongyang to provide combat convenience and drove the Janapese army in jeopardy. Seo-ae, along with Lee Yeo-song, repaired Pyongyang, followed by 3 Chungcheong. Jeolla, Kyungdsan province, became a conductor and advanced to Paju. Later, when Lee Yeo-song tried to reconcile with Japan, he insisted that it was a bad plan to send him an article to discuss reconciliation. Seo-ae continued to make up for the armament even during the reconciliation between the Ming and Japan.

He also valued people to raise their talents. Seo-ae, a teacher who established a will to save his country, enjoyed learning from a young age, and learned the teaching and knowledge of Ryu Un-ryong and Toegye. As a result, the teacher excelled in martial arts, heraldry, virtue, and writing. In particular, Seo-ae, a Toegye disciple, is a leader who has developed strategies and benefits through academic research. After retirement, Ryu Sung-ryong wrote 『Jingbirock』 for future generations while he established his academic affairs with his brother Ryu Un-hyung and exchanged his studies.

하회마을을 마주하고 자리한 부용대의 옥연정사

옥연정사의 안내문

옥연정사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뜰

관광코스 3

산책과 학문의 터 부용대와 겸암정사, 옥연정사에서
주소 : 안동시 풍천면 광덕솔밭길 72

A. 학문 연마의 터, 부용대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하외마을의 북쪽 낙동강가에 위치한 부용대는 17세기 선비들의 학문과 수행의 터다. 서애 선생은 형인 류운룡 선생과 평생 서로 존경하고 나누며 학자의 길을 완성해갔다.
부용대에서 만송정으로 올라가는 입구 왼편에 비문에는 겸암의 동생인 서애 류성룡 선생이 겸암정사의 건립을 기념해 형을 기리며 쓴 글이 보인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겸암 류운룡 선생은 학문이 높아 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류운룡 선생은 1560년에 부용대 북쪽에 화천서원을 건립해 지역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다. 겸안 선생 사후 정조 10년 1786년 유림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화천서원을 건립하고 위폐를 모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화천서원은 1970년도에 후손이 기금을 모아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부용대 소나무 숲길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하회마을 조망할 수 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면 강가를 내려다보는 곳에서 옥연정사를 만난다. 옥연정사는 서애선생이 1598년 낙향한 후 귀거하며 당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관직활동을 정리하며 글을 쓰던 곳이다.
옥연정사는 서애 선생께서 서당으로 사용하던 세심재 洗心齋와 내방객을 맞이한 원심재 遠樂齋 2채가 있다. 서당채 주련 편액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
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
서당채의 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한 자락과 마주한다. 마루에 감록헌減祿憲이라 편액이 보인다. 이 글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유래한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다. 옥연정사를 방문하며 세심재 마루에 앉아 하회마을을 마주하고 앉아 서애 선생 생전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세삼재 뒤편에 안채로 사용되는 원락재가 있다. 원락재는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명명했다. 논어 1장 학이재 편의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에서 유래한다.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글귀에서 보듯 예나 지금이나 학인들이 함께 세상하는 이야기를 하며 학문을 겨룰 수 있는 벗을 구했던 것이 동일한 바람임을 이해하게 하는 글귀다.
원락재 2칸 마루에 보이는 현판 애오헌愛吾憲은 도연명의 시 ‘ 오역애오려吾亦愛吾廬’에서 유래한다.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라는 시어에서 서애 선생의 소박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서애 선생은 원락재에서 기거하며 『징비록』을 저술했다.
부용대 투어를 마치고 배를 타고 하회마을로 갈 수 있다. 부용대를 마주하고 있는 하회마을의 서애정자에서 학문과 구국의 철학을 논하고 실행의 도를 세우던 선비들의 생활을 체험해보자.

Sightseeing course 3

From Bouyongdae, Gumamjeong, and Yeokyeonjeong
Address : 72 Gwangdeoksolbat-gil, Pungcheon-myeon, Andong-si

A. Academic Foundation, Buyrongdae, Okyeonjeong and Gumamjeong

Buyongdae, located on the Nakdong River in the northern part of the village, is the site of scholarship and practice of 17th century scholars. Seo-ae completed the path of scholars by respecting and sharing each other with his older brother, Ryu Un-ryong.
In the inscription to the left of the entrance from Buyongdae to Mansongjeong, there is a writing written by Seo-ae Ryu Sung ryong in honor of the establishment of Gumamjeong.

Ryu Woon-ryong, a teacher who studied under Toegye Lee Hwang’s writings, had a high degree of study and also taught after school in Seodang. In 1560, Ryu Woon-ryong established Hwacheon Seowon, north of Buyongdae, to train local talent. In the year 1786, Yulim established Hwacheon Seowon and began to mourn his misdeeds. However, Hwacheon Seowon, which was destroyed by Daewon-gun’s Seowon Abolition Order in 1871, was regenerated in 1970 by descendants who raised funds.

Climb up the pine forest road to the summit to view Hahoe Village. If you come down a steep hill, you will meet Okyeonjeongsa overlooking the river. Okyeonjeongsa is the place where the Seo-ae returned home after the fall of 1598, communicated with the scholars in the party, and organized the office activities.
Okyeonjeongsa has two Seimjae 洗 心 齋, which Seo-ae used as a seodang, and two scholars welcoming visitors. You can see the writing of Seodangchae juyeonbyeon.
意 或 從事 於 斯 以 庶幾 萬一 爾’
‘I hope you can achieve at least one heart here.’

If you sit on the floor of Seodangchae, you will face a hem of Hahoe Village. Persimmon juice is visible on the floor. This article comes from Wang Hee-ji’s poem.
‘Looking at the blue sky and looking down at the blue water ‘.
There is a left and right room with Gamnokhun Maru at the center. While visiting Okyeonjeongsa, you sit on the floor of Sesimjae and faces Hahoe Village, and imagines his life as a scholar.

There is a Wonrakjae that is used as an inner back of Sesamjae. Wonrakjae was named as waiting for a friend’s visiting.
It is derived from ‘『The Analects of Confucius』’
有 朋 自 遠方 來.
As you can see from the phrase, ‘If friends come from afar, aren’t we happy?’

The Aeonheon 愛 吾 憲, which appears on the 2nd floor of Wonrakjae, is derived from Do Yeon-myeong’s poem,
`’吾亦 愛 吾 廬.’
‘You can get a glimpse of Seo-ae’s simple life in the poem, I Love My Cabin.’
Seo-ae wrote 『Jingbirock』 while living in Wonrakjae.

After you finish your tour, you can take a boat to Hahoe Village.

관광코스 4

하회마을 입구 하회장터에서 점심하고 휴식하기
주소 :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214-6 하회장터

하회마을 남쪽 입구에 하회장터에는 지역 음식을 주요 메뉴로 하는 음식점이 있다. 안동찜닭, 고등어정식 등을 주요 메뉴로 판매하는 음식점 ‘하회대가집’, ‘하회민속식당’, ‘안동집’, ‘하회식당’, ‘솔밭식당’ 등이 있다. 주변에는 카페 하회커피, 각시커피 등 있다.

Sightseeing course 4

Lunch and Rest at Hahoe Village Entrance
Address : Hahoe Marketplace Jeonseo-ro, Pungcheon-myeon, Andong-si

At the south entrance of Hahoe Village, there is a restaurant with local food as the main menu. There are restaurants such as Andong Braised Chicken and Mackerel Meal, Hahoedae House, Hahoe Folk Restaurant, Andong House, Hahoe Restaurant, and Solbat Restaurant. In the vicinity, there are cafe Hahoe coffee and Gacy coffee.

영남 선비들의 학문과 인품의 나눔터 영호루

관광코스 5

선비들이 올라 시를 남긴 영호루에서 옛 선비들의 풍류를 엿보다
주소 : 안동시 강남로 187-5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전북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영가지』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
그 후 조선 중기에 홍수로 인하여 누각이 유실되었으나,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100여년 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갑술년(甲戌年) 홍수에 영호루는 다시 유실되었다.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자리하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는 안동시군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했다. 안동 시민들의 힘으로 안동시가지 남편 강언덕인 정하동 1,085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가 중건되었다.
노송이 우거진 영호루에 오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가지를 싸고 있는 영남산은 철따라 색깔이 변하며, 영호루의 절경을 이룬다. 영호루에 오르면 이 땅의 수많은 덕 높은 학자들이 시문을 겨룬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조 개국공산 정도전 을 비롯해, 정몽주, 권근 , 김종직 , 이황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 학자들이 영호루에 올라 글을 남기며 각자의 학문적 경지를 이루는 한편 후세에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Sightseeing course 5

Looking at the spirit of old scholars, Youngho-ru
Address : 187-5, Gangnam-ro, Andong-si

Yeongho-ru in Andong is a representative pavilion south of the Han River, along with Yeongnam-ru in Milyang, Gyeongnam, Chokseok-ru in Jinju, and Gwanghan-ru in Namwon, Jeonbuk. According to 『Yonggai』, when, in 10 years of King Kongmin, national crisis occurred, and the king fled with all the officials to Bokju here. In order to appease the hostile heart during the evacuation, the king often visited Yeongho-ru, standing outside the south gate, and sometimes floated the river under the pavilion. The king, who had been warned by the turmoil, promoted Bokju to Great Lakes and sent it a golden letter board with three letters “映 湖 樓” with his hand.
Later, the pavilion was lost due to flooding in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but Yeongho-ru, which was rebuilt twice, served as the gateway of Andong for over 100 years. However, Yeongho-ru was lost again in sudden flooding. With the disappearance of Yeongho-ru and the vacant land of the riverside, Andong-si people who worshiped tradition and old culture organized the Youngho-ru Reconstruction Committee in December 1969. With the help of the Andong citizens, the land of Jeong-dong 1,085 pyeong, the southern part of the Andong city, was secured. In November 1970, the historic Yeongho-ru was rebuilt.
As you climb the old pinetrees-shady Yeongho-ru, Seonbi’s Yeongbong Hakgasansan rises far northwest, and you can see the city across the river. Mt. Yeongnamsan, which surrounds the city, changes its color according to the season and forms a beautiful view of Yeongho-ru.
As you climb Yeongho-ru, traces of the poems of many virtuous scholars on the earth are powerful. In addition to the Joseon Dynasty’s Official for the Country Establishment, the representative literary scholars of the time, such as Chung Mong-ju, Kwon-geun, Kim Jong-jik, and Lee Hwang, climbed Yeongho-ru and made their academic status while leaving traces.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구국의 리더 석주 이상룡가 임청각의 전경

임청각의 사랑채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기거하며 독립운동하던 유품 전시관

관광코스 6

안동 임청각에서 구국을 향한 선비들의 열정을 찾아서
주소 : 안동시 임청각길 63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3대 독립운동가의 산실입니다.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1911년 석주 이상룡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선생은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만주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 선생은 아들 이준형에게 “조선으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라고 하자, 문중에서 극구 말리며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편 임청각은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이 터를 잡아 입향조가 되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99칸 기와집이다. 임청각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전통한옥이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한국의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특히 임청각은 일제가 임청각의 맥을 끊기 위한 의도로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를 놓는 바람에 50여 칸이 강제로 철거되었다.

임청각에는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구국의 활동들이 기록된 박물관이 있다. 현재 임청각은 한옥 스테이로 활용되고 있으며, 1박2일 여행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Sightseeing course 6

Finding the Passion of Andong Scholars to the Nation at Andong Imcheong-gak
63, Imcheonggak-gil, Andong-si

Lim Cheong-gak is the birthplace of three-generations independent activists who produced nine independent activists including Seok-ju, Lee Sang-ryong and his son and grandson. In 1911, who lost his country due to the ROK-Japan combination, Seok-ju Lee Sang-ryok disposed of his property, raised funds for independence movement, and went up to Manchuria asylum. The teacher acted as the first state decre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1925 and tried to integrate the branch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teacher went up to the shrine in Imcheong-gak, just before the exile of Manchuria, and buried the spirits and ancestral plaques on the ground. And he decided to never return home until the country became independent. In 1913, two years after the Manchurian exile, the teacher ordered his son Lee Jun-hyun to “go into Joseon and dispose of Imcheong-gak.” After his son Lee Jun-hyun, who came to Korea afterwards, said, “I will sell Lim’s hearing”, the family members in Andong gave him 500 won for a money of independent activities in Manchuria.

In the meantime, Lim Cheong-gak became the hometown of Lee Yong-Sang, the sixth son of Lee Won, who had been in Yeonguijeong during the king Sejong in Joseon. Lim Cheong-gak is a 99-kan tile house built on a staircase with a sloped slope at the foot of Mt. Yeongnamsan. Imcheong-gak is a typical upper-class traditional hanok of Joseon Dynasty, which is composed of Anchae, Jungchae, Sarangchae, Shrine, Hangangchae, Byulchae, as well as small Halls and Gardens. Lim Cheong-gak is the oldest house in Korea.
Imcheong-gak, in particular, was forcibly demolished by more than fifty kan as the Japanese ruled the Central Line railroad across the courtyard with the intention of breaking the spirit of the family.

In Lim Cheong-gak there is a museum that records the activiti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where Mr. Lee Sang-yong participated in Manchuria. Currently, Imcheong-gak is used as a hanok stay and operates a one-night two-day travel experience program.

안동 권씨 종가의 음식을 선보이는 예미당

예미당의 상차림

예미당에서는 약혼식 등 갖가지 상차림도 가능하다

관광코스 7

예미정에서 안동 종가댁 저녁식사
주소 : 안동시 정상동 481-1

안동천 강변을 내려다보며 자리한 예미정은 안동 권씨가 안동 종가의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 만든 음식점이다. ㅁ자 형식으로 건립한 한옥 중앙에 소나무는 2015년 예미정을 건립하기 위해 경북 군위군 민가에 있는 소나무를 이식한 것이다. 예미정은 안동 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의 종가 음식을 전승하여 상을 차린다. 대중적인 메뉴 안동비빔밥 반상(20,000원), 예미정 손님맞이상(18,000원), 안동 건진국수상(15,000원) 등에도 12첩 반상의 형태도 서비스 된다. 중후한 놋그릇에 한상 차림을 받고 보면 한식의 묘미를 절로 느낄 수 있다. 온돌방에 옻칠한 상에 올려진 정식을 갖가지 반찬과 함께 천천히 먹어보자.

식사 후 2층에 있는 카페로 가서 안동강가를 내려다보며 안동의 맛과 멋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2층에는 종가음식 상설시연장도 마련되어 있으니, 메밀묵, 청포묵, 손두부 등도 맛을 보자.

Sightseeing course 7

Dinner at Andong Chongga House ‘Yemijeong’
Address : 481-1, Sangjeong-dong, Andong-si

Overlooking the Andongcheon River, Yemijeong is a restaurant created by Andong Kwon to showcase Andong Jongga food. In the center of the Hanok, which was constructed in a K-shaped form, pine trees were transplanted to here which was located in the private house of the Gyeongbuk Gunwhi-gun to build Yemijeong in 2015.
Yemijeong make its food of Andong Kwon’s Bujeonggongpa Daegok family. The 12 menus are also available for the popular menu of Andong Bibimbap (20,000 won), Ye Mi-jung (18,000 won) and Andong Konjin Gukgu (15,000 won). If you have an Hansang in a heavy brass bowl, you can feel the beauty of Korean food. Let’s eat slowly with all kinds of side dishes.
After the meal, head to the cafe on the second floor and look down the Andong river and enjoy the taste of Andong. There is also a permanent taste room of the Jongga food on the 2nd floor.

안동댐 수몰로 안동 종택들을 이건해 형성된 한옥리조트 구름에

관광코스 8

숙박시설 안동민속촉 한옥리조트 구름에와 전통체험
주소 : 경북 안동시 민속촌길 190 안동민속촌길한옥마을

A. 안동댐 수몰로 이건한 전통 양반가 한옥 호텔

1976년 안동댐이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한옥 호텔로 재건했다. 한옥의 구조는 대청마루와 안채와 사랑채, 중간방이 있고, 욕실도 있다.
7채의 한옥이 있는데, 박산정, 청옹정, 감동재사, 팔회당

재사, 서운정, 칠곡고택, 계남고택 등이다.
각각의 한옥은 소유주가 있다. 객실에는 초고속무선인터넷, 에어컨, 냉장고, 커피포트, 헤어드라이기, 수건, 세면용품, 생수 등이 있다. 비용은 주중 2인실 안채 350,000원, 2인실 사랑채 300,000원, 1인실 중간방 220,000원이다

Sightseeing course 8

Accommodation, Andong Folklore Hanok Resort ‘Gurumae’ & Traditional Experience

Address : Hanok Village, Andong Folk Village Gil, 190 Folk Village Road, Andong-si, Gyeongbuk

A. The traditional Yangbanga Hanok Hotel rebuilt by the Andong Dam Sumol

In 1976, when the Andong Dam was flooded, it was rebuilt to its current location and rebuilt as a Hanok Hotel. The structure of Hanok has Daecheongmaru, Anchae and Sarangchae, and a middle room, and there is also a bathroom.

There are seven hanoks, including Park San-jeong, Cheong Ong-jeong, Impressive, Pahoedangjae, Seounjeong, Chilgok, and Gyenam. Each hanok has an owner. Rooms are equipped with high-speed wireless Internet, air conditioning, refrigerator, coffee pot, hair dryer, towels, toiletries and bottled water. The cost is 350,000 in double rooms per week, 300,000 in double rooms, and 220,000 won in middle rooms for single rooms.

구름에 상단에 위치한 북카페 구름에 오프

B. 문화체험 공간 북카페 구름에 오프!

안동민속촌 내의 한옥리조트 가장 위쪽에 위치하는 북카페 구름에 오프!는 특별한 정취가 품어나오는 곳이다. 15,000권의 인문, 여행&요리, 그래픽 노블&그림책 등 최근 Trend 반영 도서 및 안동/전통문화 서적을 구비하고 있다. 널찍한 공간에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인문학 책을 읽으며, 커피와 쑥와플을 곁들이면 제격이다.
전통체험
안동국시밀기, 북어보푸라기, 고추장 담그기, 한복입기 등 2인 이상이면 비용을 내고 체험할 수 있다.
회의와 연회
구름에 마당에서 테이블을 비치하여 30명이 참석하는 소연회가 가능하다. 회의에 필요한 스크린, 프로젝터, 무선마이크, 스피커가 구비되어 있다. 전일 대관료 500,000원, 4시간 300,000원이다.

B. Cultural Experience Space Book cafe ‘Could Off!’

Located in the top of the Hanok Resort in Andong Folk Village, the Book Cafe ‘Cloud Off!’ Is a place with a special atmosphere. It has 15,000 books on humanities, travel & cooking, graphic novels & picture books, and books reflecting recent trends and books about Andong / Traditional culture. Drinking a cool breeze in a spacious space, reading a humanities book, and serving coffee and mugwort waffles are perfect.
Traditional experience
If you have more than 2 people, you can experience it by paying more than 2 people, such as Andong-guk sipsi, drumstick lint, pepper paste dipping, and Hanbok dressing.
Meetings and banquets
Tables are available in the yard in the Gurumae, allowing small parties to attend. Screens, projectors, wireless microphones, and speakers are required for meetings. The rental fee for the day before is 500,000, and 300,000 won for 4 h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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